『미치광이 피에로』 | 몽타쥬, 팝아트, 컨텍스트

『미치광이 피에로』 | 몽타쥬, 팝아트, 컨텍스트

갑자기 를 보고싶어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 블로깅을 하려고 예전에 쓴 다른 글들을 찾아보았는데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왜 그랬지?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보던 그날밤을 잊지 못한다. 그날 저녁은 20대의 나날중 가장 슬프고 외로운 날 중 하루였다. 모 외국계 보험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휴가를 냈고, 혼자 부산으로 내려온 날이었다. 그러니까 2006년 가을이었고 그때 난 스물넷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질 것 없는 삶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무작정 극장으로 들어갔다. 딱히 사놓은 표가 없었으므로 볼 수 있는 영화를 보았다. 남포동의 모 극장에서 하는 <미치광이 피에로>. 이미 그 앞의 한국단편영화 섹션을 보고난 뒤였다. 대충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단편영화란 어떤 것이구나, 라는 감조차 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보다 좀 더 난해한 필름을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걸 봐야하나 싶었지만 달리 할일이 없었으므로 그냥 앉아서 보았다. 그때 극장 안에는 서른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고 다들 제각각 떨어져있었다. 모두 외로워보였으며 지쳐보였다. 내 옆에는 한 연인이 있었는데 그들마저 지쳐보였다. 그런 밤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전체적인 서사 자체와는 전혀 조응하지 않는 두 개의 장면이 등장하면서 페르디낭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하나는 두 여자가 테니스를 치는 장면, 그리고 페르디낭이 파리의 저명한 서점에서 벨라스케스에 관한 책을 뒤지는 장면이다. 그리고는 어느새 욕조에 앉아 말도 제대로 못하는 작은 딸을 앞에 두고 벨라스케스 얘기를 하는데 참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한 권태로운 부르주아 부부.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파티에 가야한다.

페르디낭은 아내에게 어떤 스타킹 광고에 대해 말한다. 이것 역시 상당히 엉뚱하다. 이 엉뚱한 지점이 뭔가 부르주아적인 감성과는 불화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다. 그는 부르주아 소비사회와는 결코 조화되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 당시 고다르의 영화들에 상품 광고의 프레이즈나 심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에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에서 남자(배우 이름이 누구였더라?)는 광고 기획자 또는 카피라이터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왕년의 좌파운동가인데 영화 초반에 그가 광고 기획을 하며 회의하는 장면에서도 '래밍턴 면도기' 광고가 등장한다.

페르디낭이 부르주아들의 파티에 갔을 때에. 중년의 부르주아들은 저마다의 타락 지점에서 따로따로 떨어진 삶의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다 그것은 저마다의 독백처럼 느껴진다. 그 독백들이 각각 나누어진 프레임들에 의해서 분절되어있다. 애초에 파티 장면에서 프레임 자체가 어떤 패닝 같은 무빙을 아예 갖지 않고 19세기말의 2차원적인 영화들처럼 아케이드적 구성을 갖고 있는 건 아마도 그래서가 아닐까. 페르디낭이 이동할때에만 프레임은 변환된다. 각각의 장면들은 팝아트POP-ART적인 색깔을 지니는데 그게 자못 앤디 워홀의 작업실 같은 풍경을 그려내는것처럼 보인다. 이 당시 고다르는 POP-ART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파티에서 페르디낭(설명이 늦었군. 피에로 또는 페르디낭역은 장-폴 벨몽도가 연기했다.)은 미국의 영화감독 사뮬엘 풀러를 만나고 영화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퓰러가 말하는 그 정의들을 한 여자가 통역해주는 장면인데,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는 당시 고다르가 생각하던 영화에 대한 정의와 다르지 않다. 퓰러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뮤엘 퓰러는 말한다. "영화란 전쟁 같은 것이에요. 또한 사랑이며, 증오이고, 행동이며, 폭력이고, 죽음이래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영화는 감정이지요."

부르주아 사회의 어떤 비참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하나? 아무런 지향 없는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프레임은 정지해있고, 평면적이며, 인물들의 관계는 매개없이 교차되어있으며, 저마다 제각각이고, 감정 없이 섹스에 대해 말하거나 상품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지옥 상태같은 것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에 이어서 바로 불꽃놀이 장면이 나오는 것 몽타쥬적인 해방감을 연상하는 힘을 갖는 것 같다. 대단히 시적인 내레이션을 표출시키면서 말이다.

페르디낭은 옛 연인 마리안느(70년대까지 언제나-항상 고다르의 페르소나이자 연인이었던 안나 카리나 분)를 만난다. 그녀는 이미 파티를 떠나기 전 가정부로 나타나 만났었다. 일종의 탈주가 감행되는 것이다. 고다르는 언제나 자신의 영화들 중 상당히 많은 필모그라피에 이런 식의 '탈주적' 장면을 넣어왔다. 이것이 뭐 딱히 무슨 대단한 이론적 고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전반부를 형성하는 부르주아 가정과 파티 시퀀스가 중후반부의 '국외'적 탈주극과 시퀀스적인 montage를 만들어낼 때 이 자동차 장면 자체가 어떤 징검다리, 매개, 고리를 형성해주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몇개의 작품에서도 이런 양상을 보이곤 했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콘텍스트가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일단 고다르는 미국 영화의 광팬이었는데 특히나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광팬이기도 했다는 점, 그래서 헐리우드의 자동차씬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보여왔다는 점이 그것이며 또 이것은 프랑스 문학의 취향과도 연결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이 장면은 왠지 몰라도 프랑스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대표적 작가 마그리뜨 뒤라스나 알랭 로보르그리예를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뒤라스의 경우라면 소설 가 생각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Maria는 남편 Pierre(!)와 친구인 끌레르, 그리고 어느 살인사건의 용의자 로드리고 사이에서 배회하며 일련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들이 권태로운 부르주아 사회에서 탈주하며 이용하는 수단이 바로 '자동차'인데 그것이 바로 <미치광이 피에로>의 자동차장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싶다. 로브그리예라면 단연 <질투>의 면모들을 떠올리고 싶다. <질투>에서도 '자동차'를 통한 이동이란 소설의 형식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서이다. 연인 사이에 불륜이 이루어질때 교차적이 이 자동차가 오고가고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바로 밤인 것이다. 나는 고다르가 당시의 프랑스 전반을 뒤흔든 문학적 혁명과도 가까웠던 누보로망과 어떤 연대망을 갖고 있었던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게다가 기묘하게도 의 주인공의 이름과 의 주인공 Maria, Pierre의 이름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후로 누보로망 작가 일군과 몇몇 감독들은 '누보로망'이라 불리는 영화들도 만들어내며 60년대 후반과 70년대 후반에 걸쳐 하나의 기조를 만들어내는데 <미치광이 피에로>가 누보로망 영화들과 갖는 접합 지점은 바로 이런것에 있지 않나 싶다.

이 장면을 지나면 후반부의 탈주극이 전개된다. 탈주극에서는 팝아트적인 몽타쥬 컷들, 통상적인 이야기 흐름에서의 절단, 그리고 신화적인 것에 대한 반발로서의 반신화적 비극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보통의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존재한다. 이 독자성이 이 영화에게 '이탈'의 구멍을 낳게 하는데 그 구멍은 하나의 인상적인 컷으로 대표되는 것 같다. 그 대표되는 컷은 안나 카리나가 커다란 가위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서서 위협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제스츄어를 보여주는 것인데 후반부의 탈주극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서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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