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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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저 오래된 잠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운동'이라는걸 뜨거운 가슴으로 시작할 순 있겠지만, 그것이 불똥처럼 뜨겁게 작동되는 이론적 노력과 함께 하지 않을때 결국 그 운동은 체제의 그 어떤 것에도 위협적이지 못한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대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결국 우리들 각자 개개인은 개인으로서는 조금도 완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개인적 태세가 완벽하지 못한 것을 탓하고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슬퍼했고 좌절해왔다. 하지만 그런 애상적인 안타까움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심지어 삶의 태도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운동이며 지나간 실패를 얼마나 '잘 반복'하여 '더 잘 실패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 하나로 옹호되는 저 이념없는(이념이 기각된) 휴머니즘만 남는다면, 나는 이 애뜻한 마음조차도 지키기 힘들다. (게다가 '나'라는 개인은 본래부터 엄청나게 이기적이고, 내가 빛날 수 있었던 순간은 오직 내가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꿈꾸고 다른 것을 할 때 뿐이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혁명적 전망으로부터 영영 멀어져가는 우리들의 많은 친구들이 말하는, "결국 우리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들이면서 아웅다웅하는거 아닌가요?"라는 저 자기-옹호가 어떤 부도덕함이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지독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휴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아서 대상을 정확하게 지목할 수 없는 '그/녀'는, 여전히도 자기자신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고, 그것을 '욕망'의 방향과 착각한다. 하기에 "욕망을 부정하지 말라!"는 저 지극히도 옳은 지표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비애감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저 결정들이 결국 모종의 인정투쟁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고 있다. 언제나 저 '실천적 전향(들)'의 무수한 전언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열심히 살고 계시대. 근데 정말 끔찍하게 힘들어하신대."라는 좌익적 길에 대한 전언과 함께 '대립쌍'으로 반복되어왔다. 요컨대 이런 식이었던가? <총학생회장을 했던 어떤 선배는 대기업에 들어가 일하던중 파업하는 노동자 대오에 맞서 구사대까지 했다 — ○○○ 선배는 엄청 괴롭나봐. 멋있는 선배인데 말야.> 나는 이 모든게 '변절' 따위로 표상되는 도덕적 층위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모종의 인정투쟁에서 비롯되는 '윤리'의 문제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대학시절의 생각과 꿈을 잊지 않고 노력하면서 살겠다고 선언한 많은 이들이,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사회운동적으로는 전혀 전망도 가망도 없는 길에 뛰어들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더 인내있게 지켜내길 포기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마도 이제와서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국 이 결정도 나의 몫이고, 뭔가 열심히..." 그러나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첫째. 그 결정은 당신만의 몫이 아니다. '개인'의 삶은 온갖 관계망 속에서 얽혀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관계 자체가 족쇄가 되는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이 지나간 마주침과 역사들과 긴밀하게 맞닿아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뭔가 열심히 하다보면 '잘' 할 수 있는가? 모두가 함께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것인가? 눈꼽만큼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 개인이 어떤 강력한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될수록,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잘' 해선 안된다. 그렇게 하면 할 수록 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부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한번 동지는 영원한 동지'라는 말이 먹힐 수 있는걸까?

혁명적 정세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 누구도 운동이 잘 되는 꼴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지난 20년 남한의 사회운동은 끊임없이 추락해왔다. 헌데 이 전체 운동의 지독한 패배의 과정이 바로 지난 대학시절에 대한 휴머니즘적 애상감을 휴머니즘적 자기애로 전치시키게 되지 않는가. 두 항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때는 정말 아름다웠어. 아름다운 꿈을 꿨었지!" 이것과 "지금은 우선 나 자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어." 왜냐하면 현실의 그 무엇도 자기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스러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나 역시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어떻게 하면 이 인정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 내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고민이다. 우리 정말 잘 살고 있는건가? 사람들의 삶을 섣불리, 위선적으로, 응원하고 싶지 않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위선이라고 생각하며, '뜨거운 가슴, 차가운 머리'라는 저 휴머니즘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잠언의 작동을 중지시켜, 내 머리를 더 뜨겁게 달구는 것으로, 마지막 애정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난 이 문제로 고심할 것이고, 한낫 위선적 애정의 말도 내뱉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결정과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당신이 사회적으로는 패배하고 이념적으로는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우리가 더 '이성'을 뜨겁게 달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살아야 한다. 욕할 생각은 없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므로.

덧. 통각을 포기해선 안된다. 괴로운 시대에는 괴롭기 마련이다. 이 괴로움을 더 잘 느끼고 기록하는게 이 시대를 '잘'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괴롭거나 가슴이 아플때 이 고통을 더 잘 경험하는것을 포기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