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체제
“우울은 개인의 뇌 화학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실패가 낳은 정서적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그리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80년대 들어 정신질환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우울증은 비중이 높지 않았다. 1980년대 서울정신병원 입원 환자는 1970년대보나 67.7% 증가했지만, 이 시기 입원자의 대부분은 정신분열증(조현병)이었고, 우울증은 20% 정도로 비중이 낮았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한 사례로만 언급되던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계기는 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 씨의 자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살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와 사회적 논의가 급증했고, 우울증은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우울증이 누구에게 가장 크게 전파되어 있는지 보면 그것이 왜 구조적 억압의 산물인지 보다 알 수 있다. 청년과 중장년, 노인 등 전 세대에 걸쳐 확산되고 있고, 특히 20대 여성, 10대 남성 사이에서 그렇다.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2016년 이후 지속 상승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 급증했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이 우울한 감정을 경험한 비율은 모든 연령대 중에서 가장 높았고(약 27.7%), 자살 시도 경험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농촌 고령 남성의 자살률도 매우 높고, 고독사도 증가하고 있다. 10대 청소년 자살률은 2023년 기준 10만 명당 7.9명에 달해 2015년(4.2명)에 비해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탄핵된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가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좁혀져 오자 갑자기 우울증을 호소하며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이를 통해 ‘수사 불응’과 ‘책임 감경’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 횡령 혐의로 기소된 여느 재벌 자본가들이 휠체어 쇼를 통해 책임을 회피했듯, 김건희 역시 자신의 ‘우울’을 공감과 보호의 언어로 제시하면서, 정치적 공격으로부터의 면책 기제로 악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누구나 우울증을 겪을 수 있지만, 김건희의 우울증 호소는 ‘우울’의 탈정치화를 부추길 뿐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우울’을 단지 개인적인 심리 상태나 병리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을 성과주의와 불안정 노동, 고립,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사회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즉, 우울은 개인의 뇌 화학 이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실패가 낳은 정서적 결과다. 한데 이 체제는 우울을 그저 개인 문제로 ‘병리화’하고, 약물과 진단으로 해소하는데 그친다. 그러니 우리는 존엄을 박타랗는 체제에 분노하는 대신, 내면화된 자기혐오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20세기 후반 정치권력과 매스미디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을 ‘혁신과 변화로 가득 찬 미래’를 제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남은 것은 끊임없는 양극화와 기후위기, 반복과 복고 열풍뿐이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우울이 사회를 지배한다. 공공성이 사라진 자리에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쟁투만 난무할 뿐이다. 교육·복지의 시장화와 불안정노동으로 개별화된 개인들은 무한경쟁과 자기계발 압박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존엄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공적으로 애도되고 기억될 수 있다는 보장에서 비롯된다. 공공의료와 돌봄, 주거권은 존엄의 기반을 이루며, 인간의 삶이 상품성이나 효율로만 평가되지 않는 세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사회공공성은 고립된 개인을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복원하며, 사회적 고립과 권리 박탈에 맞서 손길을 내미는 유일한 기반이다.
시장주의 노선을 강화하는 새 정부나 기술관료들이 주도하는 행정 권력, 위성정당 노선에 기댄 진보정당 등 기득권 정치를 믿고 기다리는 건 무모하다. 대신 우리는 풀뿌리를 단단하게 하고,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도모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우울증으로 내모는 체제에 맞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믿음과 희망의 조건을 구축해야 한다.
못 할 이유가 있겠는가. 대통령도 몰아냈는데.